#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패전으로 치닫던 1944년 6월, 미‧중 연합군(Y군)은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을 공격, 9월 7일과 14일 각각 송산과 등충을 함락했다. 당시 이곳에는 일본군에 의해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 7~80여 명이 있었다. 이중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생존한 23명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전쟁 막바지 패전이 임박한 일본군에 의해 학살돼 버려졌다.

# 당시 미‧중 연합군(Y군 제54군)이 보고를 위해 작성한 문서에는 등충이 함락되기 직전인 9월 “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울시가 3.1절 99주년을 기념해 27일(화) 개최한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컨퍼런스」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학살했음을 보여주는 영상을 최초로 공개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 직전인 1944년 중국 등충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학살된 후 버려진 모습을 담은 19초 분량의 흑백영상이다. 또, 당시 미‧중 연합군이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을 분명히 인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연합군 보고문서도 함께 공개했다.

영상은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교수연구팀(이하 ‘서울대 연구팀’)이 '16년과 '17년 두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을 방문해 끈질긴 자료조사와 발굴 작업을 거친 끝에 촬영된 지 7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서울시와 서울대연구팀은 이 영상자료 1점을 비롯해 사진자료 2점, 당시 미‧중 연합군(Y군)이 작성한 작전일지를 비롯해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 사실을 뒷받침하는 문서 14점도 함께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한 자료는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공격한 중국-버마-인도 전구(戰區, CBI Theater) 미‧중 연합군(Y군)이 생산한 것이다.

영상에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후 버려진 참혹한 모습이 담겨있다. 주변으로는 시신을 매장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중국군 병사 두세 명의 모습도 보인다. 연합군 164통신대 사진중대 B파견대의 볼드윈(Baldwin) 병사가 1944년 9월 15일 촬영한 것으로, 영상 속 장소는 중국 운남성 등충성 안 밖의 장소로 추정된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증언, 기사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조선인 ‘위안부’를 포함해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 현장이 촬영된 영상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기록은 당시 중국 국민당 기관지 <소탕보>(1944.9.18.)와 <중앙일보>(1944.10.16.) 등에서 기사화된 바 있지만, 미군의 공식 작전일지 및 정보보고에 기록된 것은 이번에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이 발굴한 문서들이 현재까지 유일하다.

특히 패전이 임박한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등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당시 일본 작전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 대좌는 “지원병력이 도착하는 10월까지 계속 저항하라”는 사실상 ‘옥쇄’(강제적 집단자결) 지시를 내렸고, 이를 거부했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부 민간인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중국 송산에는 24명, 등충에는 최소 30명 이상의 위안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4년 6월부터 중국과 버마 국경지대(원장(援蔣)루트)에 소재한 중국 운남성 송산과 등충을 공격을 시작한 Y군은 9월 7일 중국 운남성 송산을 점령했고, 9월 14일 등충을 함락했다. 송산과 등충에는 각각 2천여 명의 일본군 수비대(송산 56사단 113연대 주력, 등충 148연대 주력)가 있었고, 조선인 위안부들과 민간인들이 함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송산에서 조선인 여성 6명(<G-3 Daily Diary Sept 8, 1944>), 등충에서 13명(<G-3 Daily Diary Sept 15, 1944>)의 여성이 포로로 잡혀 생존했고, 나머지는 대다수 옥쇄를 거부했고,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런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 사실은 미 연합군도 인지하고 있었다. Y군 제54군이 14일 18시 55분에 보고한 정보 문서(<G-3 Daily Diary Sept 15, 1944>)를 보면, 등충이 함락되기 직전인 9월 “13일 밤 일본군은 성 안에 있는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또,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이 앞서 '16년 수집한 조선인 ‘위안부’ 학살현장 사진 원본(2장)과 같은 곳에서 촬영된 것으로 확인돼 역사적 입증자료로서 무게를 더한다. 연구팀은 전쟁 당시에는 사진촬영과 영상촬영이 함께 이뤄졌었다는 점에 주목, '16년에 ‘위안부’ 학살 사진을 수집한 이후 그 후속작업으로 영상에 대한 수개월간의 타겟팅 및 목록화 과정을 진행해 1년 만에 영상 발굴에 성공했다.

연구팀은 '17년 발굴한 영상과 '16년 수집한 사진원본이 각도만 다를 뿐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로 영상과 사진 속 시체의 옷차림, 매장을 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 중국군 병사가 영상 속에도 등장하는 점 등을 제시했다.

사진 자료는 등충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된 모습을 담은 2장(사진병 프랭크 맨워렌(Frank Manwarren) 촬영)이다.

영상 속에는 사진에 등장하는 중국 병사가 시체의 양말을 벗기는 모습이 나온다.

강성현 교수(성공회대)는 “일본정부가 위안부 학살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 말기에 조선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원순 시장은 “나라를 잃고 힘이 없는 조국에서 여성, 소녀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며 “이러한 불행한 역사도 기록하고 기억해야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만큼 앞으로도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자원을 집중해 역사를 기억하고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시와 연구팀은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특히 전시에 여성을 전쟁터로 동원하고 성적 '위안'의 도구로 사용하다가 최후에 '특종군수품' 폐기라는 발상으로 학살하는 일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며, 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사과해야만 이런 상황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올해도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을 추진한다. 국내‧외 발굴조사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기록물로 관리해 역사적 자료로 활용하고, ‘위안부’ 관련 연구와 외교적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계획이다.

시는 서울대 연구팀과 손잡고 '16년부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물 발굴‧관리에 나서고 있다. 앞서 조선인 위안부를 실제로 촬영한 흑백영상을 세계 최초로 발굴‧공개('17.7.)하고, 그동안 증언으로만 있었던 남태평양 트럭섬의 조선인 위안부 26명의 존재를 최초로 확인('17.12.)한 바 있다.

지금까지 발굴한 문서, 증언, 사진, 영상 자료는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콘텐츠 제작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그 시작으로 오는 3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사료를 교차분석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사례집을 시리즈로 출판할 계획이다.

<27일(화) 3.1절 99주년 한‧중‧일 ‘위안부’ 전문가 ‘일본군 ’위안부‘ 국제컨퍼런스’>

한편, 27일(화) 「일본군 ‘위안부’ 국제 컨퍼런스」는 한국, 일본, 중국 ‘위안부’ 전문가들이 발표자로 나서 각국이 소장한 ‘위안부’ 자료 현황을 공유하고, ‘위안부’ 자료 조사의 향후 과제와 협력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로 진행됐다.

한국 : 서울대 연구팀의 강성현 교수(성공회대)와 함께 국사편찬위원회 황병주 편찬연구관이 발표자로 나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연합군번역통역부(ATIS)가 생산한 모든 자료들을 소개한다. 이 자료들은 위안소가 일본군의 전적인 책임 하에 있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본 :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이하 WAM)’의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이 ‘위안부 아카이브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역사수정주의 정권의 장기화, 교과서나 박물관에서의 ‘위안부’ 관련 기술의 삭제, 언론, 지식인 등의 학습부족과 무관심 등 일본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잊히고 있는 현실에서 ‘위안부’ 자료의 기록과 아카이브의 중요성에 대해 발표했다.

WAM은 2005년 일본 도쿄에서 시민들의 모금으로 설립돼 지난 12년간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국제법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유엔 인권기관에 관련 자료를 제공하고, ‘위안부’ 상설전 및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 연구, 교육사업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 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서적과 시민활동 기록의 수집, 영상작품, 소송자료, 전시사업을 통한 자료 수집을 통해 이를 아카이브해 보존하고 있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전국 행동’의 고바야시 히사토모 연구원은 반세기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위안부’ 관련 자료의 조사·연구를 진행시켜 왔지만 그러한 성과가 일본정부의 사실 인정에 활용되지 않았다는 현실에 주목했다. 또 일본정부에 대해 가해사실을 제대로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국제사회 활동을 한층 더 전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주장했다.

고바야시 히사토모 연구원은 새로 발견된 ‘위안부’ 관련 자료 안에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드러낼 만한 기술’이 포함된 문서가 존재하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관리 운영하고 있었다는 점도 밝혀졌으며 ‘위안부’ 생활은 그야말로 성노예적인 상황이었고 ‘위안부’ 문제는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고 강조했다.

중국 : 길림성당안관의 자오위제(趙玉潔), 뤼춘위에(吕春月) 연구관원이 발표자로 나서 길림성당안관에 보관된 일본의 중국 침략 기록문서와 발굴 상황에 대해 소개하고, 일본군 가족의 위안소 공정(公定)요금 이용에 관해 새로 발굴한 기록을 발표했다.

길림성당안관에서 새로 발굴한 기록문서 중에는 일본 군인이 위안소 이용 시 사용한 면세표(免稅票) 문제가 언급돼있는데 특별 매전세 면제표는 만주 스먼즈(石門子)1013부대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특별 면세표를 가지고 있으면 1엔 50전 하는 위안소 이용요금이 1엔으로 할인되어 비용이 30% 정도 줄어든다. 2014년 길림성당안관에서 공개한 헤이허(黑河)에 주둔하던 일본 사병의 서신에는, 군인들의 군대직속 위안소 유흥비 할인현상을 언급하고 있다. “(전략) 끝없이 펼쳐진 북만주 광야에서 유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육군관사 한 구석에 동서방향으로 설치된 위안소이다.”

즉, 이 문서에는 위안소 유흥비 할인 특혜가 군인들의 전유물이었다는 것과 군인의 계급에 따라 특혜 혜택에 차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뤼춘위에(吕春月) 연구관원은 발표를 통해 ‘위안부’ 제도의 반인도적 역사의 실상은 기록 문헌의 발굴과 실증조사가 진전됨에 따라 역사의 진상규명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며, 기록문헌의 지속적인 발굴은 여전히 ‘위안부’ 연구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업무이자 장기적인 과제라고 밝혔다.

종합토론에 참가한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자료조사팀들이 수백 점이 넘는 ‘위안부’ 자료 수집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동력은 수년간에 걸친 관심과 일관된 자료 축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는 “일본은 이 책임을 인정한 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한 사죄를 해야 한다”며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미투 및 위드 운동도 궁극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닿아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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